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민정음 해례본 (문단 편집) === 일본 발견본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img.yonhapnews.co.kr/PYH2013022700700005303_P2.jpg|width=100%]]}}}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img.yonhapnews.co.kr/PYH2013022700710005301_P2.jpg|width=100%]]}}} || || 세종의 익선관으로 추정되었던 모자 || 마감재로 사용된 훈민정음 활자본이 보인다. || [[2013년]] 2월, [[일본]]에 있던 조선 왕실 유물인 비단 모자를 한 수집가가 구입했는데 이 모자가 이슈가 되었다. 이 모자가 먼저 1444년 이전에 세종이 사용하던 익선관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. 근거가 크게 2가지 있었는데, 첫 번째로 모자안에 마감재 같은 용도로 종이가 들어있는데 그 종이가 세종 이전에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'''훈민정음 제자해 활자본'''이었기 때문이다. 이것뿐이라면 세종 이후 시기의 모자라는 증명에 불과했지만, 이 모자에 새겨진 용의 발톱이 4개라는 것 때문에 세종의 익선관이라고 콕 찝어 추정하게 됐다.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이전까지 용의 발톱이 4개인 사조룡복을 입었다가 1444년에 명에서 용의 발톱이 5개인 오조룡복을 하사하여 이후 그것을 입었다고 나와있다. 즉 세종 이후의 것이라면 용의 발톱은 4개가 아니라 5개여야 한다는 논리가 된 것이다. 만일 세종이 쓰던 익선관이 맞는다면 현재 남아있는 안동본과 상주본의 1446년을 앞서는 버전일 가능성이 높았기에, 저 모두가 사실일 경우 진짜 국보급 보물이 되는 것이기에 당시 기대가 엄청나게 치솟았다. 그러나 감정 결과, 모자가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지면서 논란은 가라앉았다. [[https://www.ytn.co.kr/_ln/0115_201310021646343283|#]] 하지만, 이 모자에서 훈민정음의 판본 일부가 있는 것 자체는 사실이고, 세종대왕의 익선관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조선 복식 연구에 큰 도움이 되는데다 가치가 높은 희귀 유물인 것도 여전히 사실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